두 가랑이를 연상시키는 능선 사이의 협곡은 거웃처럼 검은 빛깔 투성이였다. 진폐증 환자 같은 뻣뻣한 나무들도, 울퉁불퉁한 좁은 길도, 산기슭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집들도 검은 탄가루를 잔뜩 뒤집어쓰고 있었다. 그런가 하면, 계곡의 뼈 무더기처럼 튀어나와 있는 바위들 사이로 흐르는 계곡물마저 거무스름히 보였다. 검붉게 죽어가는 고사목의 가지들이 차창을 탁탁 칠 때마다 봉옥은 고개를 움찔거렸다. 잊고 싶은 오욕의 기억들이 그 써늘한 촉수를 내뻗치는 것 같아 몸이 절로 움츠러드는 것이었다.
봉옥은 가만히 두 눈을 감았다. 마을 사람들에게 '꺼꾸리'라고 불렸던, 이제 하루 이틀을 못 넘길 것 같다는 아버지의 마지막 길을 빌어 주고 싶어서였다. 중풍의 긴 투병생활의 고통을, 꺼꾸리라는 말의 괄시를, 6·25 때부터 안골 마을 사람들한테 마귀처럼 들씌워졌던 좌익이라는 멍에를, 홀아비로서의 외로움을 이제는 훌훌 털어버린 채 참으로 좋은 생을 맞이하도록 빌고 또 빌고 싶어서였다.
하지만 봉옥은 금세 기도하는 걸 단념하고 말았다. 아버지라는 말만 침이 말라 바싹바싹 타는 입안에서 맴돌 뿐 그 다음 말이 도무지 생각나지 않는 것이었다. 엉뚱하게도 봉옥이 현소와의 불륜을 청산하고 마을을 떠나려고 했을 때, 아버지가 노잣돈처럼 주었던 몇 마디의 말만 생생하게 떠올랐다.
"어서 떠나그라잉. 지금이 젤로 좋은 때인께. 새벽을 시작이라고 허지 않드나? 대처에 나가 새로 시작허그라."
"난 사람덜헌티 네 떠나는 꼴을 보여주기 싫응께. 저 하늘을 보그라. 힘차게 물결치는 것 같지 않느냐. 기죽지 말고 저러크롬 살그라."
봉옥은 한숨을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아버지를 터무니없이 원망했던 사람 중에 자신도 예외는 아닐 터였다. 객지를 나와 장돌뱅이처럼 떠돌면서 끼니를 거를 때마다, 재수가 없을 때마다 맨 먼저 아버지를 원망했던 것이다.
남편이 모른 척하지 않고 "고향이 있으면 뭐 낫당가. 발길 닿는 대로 정 주면 고만이제."하면서 달랬지만 억센 성깔의 봉옥이를 누그러뜨리지는 못했다. 봉옥의 기분을 삭이기 위해 남편이 쑥대머리를 한 가락 뽑으며 광대 노릇을 해주어도 역시 마찬가지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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