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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소설] 겨울남행 <8> - 정찬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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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이뉴스24가 단편소설을 연재합니다. 출근길 지하철에서, 버스에서, 브런치가 있는 카페에서 깊이와 재미를 더한 소설을 즐기며 하루를 준비할 수 있기를 기대합니다. 언제나 맑고 선명한 언어로 인간의 내면 이야기를 즐겨 들려주는 정찬주 작가가 이번에는 집요하고도 진득한 문장으로 지나간 시대의 아픔을 말해 줍니다. 소설에 담긴 비극은 분명 과거에 속한 것이지만 새로운 모습과 형태로, 아니 더욱 강고하게 현재를 지배하고 있기에 바로 오늘의 이야기 우리의 고통으로 다가올 수밖에 없습니다.[편집자]

"스님, 계십니까?"

"어디서 오셨습니까, 처사님."

문을 빠끔 열고서 되묻는 스님의 얼굴은 초면이었다. 하긴 주지스님이 바뀐 지 삼년이 흘렀으니…… 허물어져 있는 돌담이 낯익어 보였다.

"오준세라는 처사를 찾아왔습니다."

"어디서 오셨는데요."

"서울에서 온 친구라면 알 겁니다."

스님이 경계의 빛을 풀었다.

"저 암자에서 좀 기다리시지요. 방에서 기다리시든지요."

"아, 아닙니다."

스님이 준세를 데리러 간 동안 형규와 여자는 3층 목탑 쪽으로 갔다. 목탑의 추녀 끝들이 하늘로 이어지고 있는 듯했다. 추녀 끝에서 풍경들이 청정한 소리를 떨어뜨렸다. 여자의 말대로 독특한 심우도었다. 소를 찾는 사람의 머리 위에는 꼭 새들이 몇 마리 날았다. 소 찾는 사람의 마음을 상징한 것일까. 하늘로 치솟는 모습, 허공에서 싸우는 모습 등 열 가지의 구도가 조금씩 달랐다.

순간, 형규는 그 주지스님을 생각했다. 심우도를 보고 있는 동안 그 편지가 생각났다.

我今終生死

誰得誰失度

過去無來處

海光自靑靑

나는 이제 생사를 마치려하오

뜻은 얻은 것도 없고 잃은 것도 없는데

과거는 온데간데없고

바다 빛은 절로 푸르디 푸르오

이윽고 준세가 스님보다 빨리 걸어왔다.

준세는 삭발을 하고 있었다. 준세라고 해야 될지 스님이라고 해야 될지 형규는 머뭇거려졌다. 준세가 눈치를 챈 듯 웃었다.

"나같은 놈이 어떻게 감히 스님이 될 수 있나?"

준세는 청음사에서 나름대로 마음의 평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목소리에 활기가 묻어 있었다.

형규와 준세는 좀 전의 스님 방으로 들어갔다. 여자도 뒤따라 왔다. 보살이 요깃거리인 양 삶은 고구마가 담긴 대바구니를 놓고 가자, 스님이 자리를 비워 주었다.

"참, 서울에서 같이 내려온 분인데 여기 벽화를 보러왔네."

여자가 고개를 숙이자 준세도 어정쩡하게 따라서 목례를 보냈다.

"처소 좀 부탁하네. 난 상관없고, 밤차를 탈 테니까……."

"걱정 말게. 자네, 꼭 가야 되나?"

"학기말이 돼서 그래. 미안해."

형규는 비로소 막막해졌다. 이럴 땐 어떤 말부터 꺼내야 되는 것일까. 준세는 고구마에 붙어 있는 알들을 떼어내 누런 한지 쪽지에 모으고 있었다.

"새들도 공양해야지."

"폭설이 내리니까 새들이 법당 추녀 밑 벽화 쪽으로 모여들더군."

밖에서 스님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눈을 쓸고 있는 모양이었다. 방안 분위기가 무거워지는 것 같자 여자가 일어섰다. 열린 문 사이로 찬 공기가 밀려 왔다. 눈 덮인 잣나무 한 그루가 누군가의 가슴앓이처럼 보였다. 형규는 그런 생각을 하면서 천천히 입을 떼었다.

"자수를 권하러 온 게 아닐세……"

준세는 형규의 말을 듣고서 한동안 침묵했다. 눈을 감고서 바위가 되어버린 듯 꿈쩍을 안했다. 형규는 그의 당숙 얘기도 마저 해주었다. 그때서야 준세는 겨울 물결이 솟아나듯 조용히 일어났다.

형규는 준세를 따라서 밖으로 나왔다. 여자가 눈을 맞으며 벽화를 보고 있는 게 보였다. 여자가 바라보고 있는 벽화 속의 새들이 훠이훠이 날아가 버릴 것만 같았다.

그때, 암자 쪽을 응시하며 준세가 말했다.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다고 하니 차라리 홀가분하네. 늘 나 때문에 고생만 하시던 어머니가 자꾸 떠올라 입산(入山)을 망설였지. 출가(出家)하겠네, 이젠. 봄날 죄 없이 죽어간 원혼들은 물론 어머니의 외로운 넋을 위해서."

그리고는 암자로 가는 눈길을 벽 속의 소처럼 뚜벅뚜벅 걷기 시작했다. 무주고혼들을 바라보고 있는 듯한 그의 표정이 너무나 결연하여 형규는 아무 말도 못했다. 여자가 영문을 모른 채 뒤쫓아 왔다. 여자의 등 뒤로 보이는 계곡은 눈발로 가득 채워지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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